
시간의 열쇠
김명석
갤러리 건물같이 운치 있는 제천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예상보다 20분 이른 시각이었다. 전화를 하니 제천 친구가 시간을 채우고 차로 마중 나왔다. 하루 전에 갑자기 정한 방문 일정이었다.
일 년여 전으로 기억된다. 제천 친구의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다 보니 내년 6월이면 정년퇴직을 하니 자기에 대한 시도 지어 달라고 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한두 달쯤 뒤에 메시지가 왔다. 내 장편소설에 대한 독후감이었다. 짤막했지만 감동적이었다. 이때부터 부담을 머리에 이게 되었다.
최근 들어 6월 말이 눈앞에 다가와 시간이 촉박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난주에 큰맘을 먹고 하루를 들여 그의 정년퇴직을 기리는 시를 지었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급작스럽게 제천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주 목적지는 신림역이었다. 신림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나의 첫 근무지였는데, 그런 곳에서 제천 친구는 4년 전부터 근무하고, 그에게는 마지막 근무지가 되게 되었다. 내가 시작하고 그가 매듭짓게 되니 끈끈한 관계였다. 내년 말이면 중앙선이 폐선이 되어 폐역이 되는데, 그 친구가 근무하고 있을 때 꼭 가 보고 싶었다.
차에 올라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묻기에 여기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의림지 인근의 묵 요리 전문점 앞에 차를 세웠다. 다소 의아했지만 종이 쇼핑백을 손에 들고 그를 따라 음식점에 들어갔다. 홀은 한산했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니 제천 친구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자에 앉고서 쇼핑백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맞히면 주고 못 맞히면 안 준다고 했더니 입을 비죽였다. 이내 쇼핑백에서 액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만든 시화가 담긴 액자였다.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그에게 1년의 시간이 걸린 깜짝 이벤트였다. 나는 곧 그에게 40년 동안 외길을 걸은 그의 정년퇴직을 기리는 시 종착역 신림역을 낭송하며 헌시했다.
풋 미소년을 실은 기차가 / 덜거덕 은빛 외길을 달려 / 찻간에 시간과 족적을 남기고/ 사십 년이 되어 종착역에 멈췄다 / 고압선에 지탱한 화사가 신림에 똬리를 틀어 / 장끼가 목울대를 울리고 / 치악산 옥수가 초로의 발을 씻긴다 / 이제 무거운 짐일랑 선반에 놓아두시게 / 도화 홍안은 퇴색돼도 복숭아 주렁주렁하지 않은가 / 겨울이면 감악산 역사지붕 백발 되어도 / 봄이 되면 도화 소생하고 복숭아 풍성하다 / 감자바위가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어 / 꿀벌의 날개 프레스토 활개 치고 봉밀 넘친다 / 제2의 생로 시발역 신림역에서 / 쉰아홉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 안식과 소망을 품고 / 기적 소리 다시금 울리며 / 청홍 기차는 계속 달린다
친구는 얼마나 좋았는지 옆 식탁의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퇴직하는 날 직원들에게 낭송하고 떠나겠다고 했다. 묵 요리는 별미였고 만족스러웠다. 요리를 즐기는 동안에 홀은 만석이 되어 있었다. 줄 서서 먹는 음식점이라고 했다. 묵 요리를 하나도 안 남기고 싹 비우고서 음식점을 나와 의림지로 갔다.
의림지를 즐기기 전에 제천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의림지 역사박물관 시간의 함을 관람했다. 최근에 개관한 의림지 역사박물관은 첨단적인 체험 박물관이었다. 저수지를 축조하고 못물을 대는 일을 터치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이 되어 본 기분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시원한 칡즙을 마시며 의림지의 산책로를 거닐었다. 제천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용두산의 개울물을 막아 축조했다고 하는데,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같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저수지 중의 하나이자, 지금까지도 못물을 대는 유일한 저수지이다. 의림지는 천사백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삶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제림(堤林)에 둘러싸인 의림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드디어 신림역을 찾았다. 38년 만에 본 신림역사는 깔끔하게 단장했을 뿐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감 어린 시골풍의 분위기. 역사 앞에 친구에게 시화 액자를 들게 하고 정년퇴직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약관의 청년이 시발역에서 시간의 기차를 타고 종착역에 도착하는 동안 40년이 쏜살같이 지나가 졸지에 초로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플랫폼으로 들어서니 시간의 흔적이 서린 수 개의 철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당시에 이 철길들을 걸으며 일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년이면 이곳에 시간의 기차는 더 이상 달리지 않을 것이다. 1941년에 첫 근무를 한 이 역도 친구와 같이 정년퇴직하는 것이다. 폐선이 되는 중앙선 전체 구간에 대한 복합적 관광 테마화가 추진되고 있는데, 신림역도 테마화가 잘되기를 기대한다.
첫 근무지인 신림역을 떠나 이 지역에서의 마지막 근무지인 반곡역에 도착했다. 반곡역사도 깔끔하게 단장했을 뿐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근무하던 주재 건물도 창고 용도로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당시에 이곳에서 일하던 모습도 눈에 선했다. 반곡역은 이미 14년 전인 2005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대합실은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었다. 방문객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신림역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반곡역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지금까지 제천 친구와 함께 시간의 열쇠로 열고 다니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지나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도 족적은 남아 있으리라. 나도 친구도 누구나 자신의 시간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어떤 문을 여느냐에 따라 시간 속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천국에까지 친구와 동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명석 / 소설가
2022년 현대계간문학 등단장편소설. 『기억의 분식집』 『반달』 『후회 없이 돌이키지 않게』 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