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로 수필 '비닐우산'이 한국수필작가회 대표작 선집 '하얀 그림자(2023년)'에 수록되었습니다.
비닐우산
장마철이면 비를 막기 위해 꼭 가지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 우산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비를 좋아했다. 비닐우산 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비가 자주 오면 비례해서 주문이 늘어나서 수입이 많아졌다. 특히 장마철에는 주문량이 폭주해 공장이 쉴 틈 없이 가동되었다. 지금이야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등의 고급 우산 시대라서 그까짓 비닐우산,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60, 70년대에는 가장 대중화되었던 우산이어서 아버지는 몇 년 동안 돈을 많이 벌어 당시에는 흔치 않던 2층짜리 양옥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비닐우산은 일본에서 개발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 바쿠후 시대인 1721년에 창업한 전통의 다케다상점이 1958년에 개발했다. 다케다상점은 10대 사장인 스도 쓰카사에 의해 1972년에 화이트로즈로 개명되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역사적인 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그전에는 주로 사용된 면 우산이 방수가 잘 안 되어 문제가 있었는데 누수가 안 되는 비닐우산을 개발해 일대 혁신을 이룬 것이다. 비닐우산은 개발된 지 6년 뒤인 1964년에 전환점을 이루었다. 대중 매체에 긴자에 속이 비치는 우산이 유행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되면서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졌고 또한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뉴욕의 바이어가 수입해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비닐우산 사업을 하기 전에 아버지는 집을 지어서 파는 소위 집 장사를 했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집 장사로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1968년에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한 1⸱21 사태로 인해 서울 땅값이 폭락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집 장사를 접었지만,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정리한 자금으로 발 빠르게 비닐우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비닐우산은 대나무 오리로 된 살에 비닐을 씌워 만든 우산이다. 비닐우산의 구조는 비를 막는 천장인 비닐, 대나무 원통으로 된 손잡이 겸 대, 비닐을 받치는 윗살, 윗살을 받치는 받침살, 천장 윗부분에 튀어나온 둥글넓적한 캡, 우산을 펴거나 접을 때 이용하는 고정쇠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의 비닐우산을 만들기 위해 당시에는 공정이 기계화되어 있지 않아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일손만큼 수입이 증가했다. 꼭지인 캡에는 상표가 찍힌 종이를 얹어 비닐을 씌워 묶었는데, 아버지의 공장에서 만든 우산에는 ‘金’자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만큼 당신의 제품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오면 아버지의 비닐우산을 학교에 자랑스럽고 즐겁게 쓰고 갔다. 요새 우산은 고급스럽기는 해도 그때의 비닐우산처럼 정겨움은 없다. 비닐우산을 쓰면 빗소리를 정겹게 들을 수 있었다. 비닐우산은 타악기였다. 비가 내리면 가락이 울렸다. 비가 쏟아지면 거리에 파란 비닐우산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었다. 비가 내릴지라도 비닐우산의 파란 천장이 하늘로 연상되어 하늘 바로 아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맑았다. 비닐우산은 그야말로 집안에 비바람을 막아 주는 우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정겨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비닐우산은 약해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비바람이 거세면 비닐은 잘 찢어지고 살도 잘 부러졌다. 당시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사람들은 찢어진 우산이나 부러진 우산도 곧잘 쓰고 다녔지만 폭우를 만나면 몸이 흥건히 젖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느닷없이 대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공장 직원이 “사장님, 큰일 났어요. 공장에 불이 났어요” 하며 숨넘어갈 듯 전했다. 잘나가던 비닐우산 사업이 화재로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보증을 선 것까지 잘못되어 집마저 날아가 졸지에 달동네 판잣집 셋방살이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 장사를 할 정도로 집에 대한 애착이 컸었는데 처음으로 집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망가진 비닐우산 꼴이 되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재기하려고 발버둥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전거와 오토바이에 물건들을 실고 다니며 장사한 끝에 7년 만에 허름한 기와집일지언정 내 집을 다시 마련할 수 있었다.
기와집에서 나는 비닐우산을 집이라고 생각했다. 대는 기둥, 비닐은 지붕, 살은 서까래로 여겼다. 아버지는 거센 비바람을 맞아 찢기고 부러졌어도 집안을 지탱한 파란 비닐우산이었다. 그때까지는 철이 없어 몰랐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의 심정과 정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비닐우산이지만 또 어려움을 당하면 아버지처럼 강인하게 이겨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파란 비닐우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