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내 이름은 막내/ 추미애/ 미래시학 2025년 봄호

솔랭코 2025. 3. 26. 12:31

 

내 이름은 막내

 

추미애

 

 

어릴 적부터 나는 집안에서 막내로 불렸다.

 

나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둘째였던 쌍둥이 동생은 불행히도 사산되었다. 나도 정상이 아닌 저체중아였고 발육도 너무 느리고 병치레를 많이 해 출생신고도 바로 하지 못하다가 엄마가 정성껏 약을 먹이며 정상아로 만들어 2년 뒤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사유로 아빠는 때때로 쌍둥이 동생의 죽음이 안타깝고 아쉬워 살아 있었으면 나와 똑같이 생겼을 녀석이 하나 더 있어 좋았을 텐데 하시며 한탄하시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3대 독자인 아빠는 무뚝뚝하지만 당신의 방식으로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진짜 엄마가 낙태하기 위해 복용한 약 때문이었는지 엄마의 계단 구르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평생을 힘들어하셨다.

 

엄마는 살아생전 대장암과 치매를 앓았는데 병이 악화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됐었다. 우리 5남매는 엄마가 투병하는 2년 동안 당신이 평소에 바라던 대로 병간호를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런 중에 묘하게 엄마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내가 병간호 당번을 맡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 호스피스 병동에 도착해 보니 엄마는 저번 주에 봤던 모습과는 또 너무나 변해 있었다. 정말 이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바로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부서질까 봐 도저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너무 미안하고 아파서 뭐라 할 수 없는 마음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날 당번인 작은언니는 분명 엄마가 자기를 알아본다고 했는데. 이날은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하고 놀라서 간호사실로 뛰어가 우리 엄마가 막내딸을 못 알아보니 빨리 오셔서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간호사분이 엄마에게 가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할머니, 여기 누구야? 기억나? 할머니 자식 있어요?”라는 물음에 우리 엄마는 아니요, 없어요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엄마는 그저 두 눈을 감은 채 힘든 고통과 싸우셨다. 밤이 되고 엄마는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에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막내로서 그 옆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기적이 일어났다.

 

자식이 없다던 엄마는 그날 밤 종국에는 온 정신을 집중해 자식들을 기억해 내고 허공에 손을 뻗어 큰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자식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부르짖으며 외치셨다. 그런 중에 나는 진짜 내 이름을 부르시기를 기대했지만 엄마는 마지막까지 나를 막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빠가 폐암 투병 끝에 떠나신지 6년 뒤인 향년 76, 엄마가 좋아하던 계절인 봄 513일이었다.

 

사실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은 하나 더 있었다. 자폐증 성향이 있는 큰오빠다. 큰오빠는 여덟 살 수준의 지능을 지닌 지적 장애인이다. 엄마는 그런 큰오빠 뒷바라지로 한평생을 살다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큰오빠는 혼자 남았다. 아무도 큰오빠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 품을 잃은 큰오빠는 졸지에 길을 잃은 미아 같아 보여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런 아이 같은 큰오빠를 두고 눈을 감았을 엄마 모습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온통 큰오빠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큰오빠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떠난 슬픔도 내겐 너무나 벅찬 일이였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큰오빠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은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슬픔도 가시기도 전에 나는 큰오빠를 데리고 이리저리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 알아보며 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 중에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큰오빠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지능 검사를 받고 오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나는 7, 8개월 동안 큰오빠를 데리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진을 받게 했다. 그런 중에 한 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검진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다시 그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큰오빠의 지능이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큰오빠가 지능이 보통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통곡하고 말았다. 큰오빠도 그렇지만 그런 큰오빠를 보살피며 고생하셨을 엄마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 후로 큰오빠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지만, 가끔 큰오빠와 만나는 날이면 그는 어제는 비가 많이 와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울고 때론 꿈에 엄마가 나타났다며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면 여덟 살 수준의 덩치만 큰 어린 큰오빠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사실 막내인 나도 같이 울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큰오빠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울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 둘이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막내지만 엄마와의 약속과 책임감으로 힘들어도 엄마 대신 큰오빠를 돌보는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가족은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때론 살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세상에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언니, 오빠들은 내가 막내라는 이유로 응석도 받아 주고 많이 배려해 주었다. 가족은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제일 큰 유산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희생하시며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냥 당신처럼 살까 한다. 새싹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만발하는 5, 봄의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그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다시 편안해지려 한다.

 

 

추미애

 

한국수필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화성시체육회 주최 <등대의 꿈> 사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