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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고엽/ 약수터/ 겨울 꽃/ 김명석/ 詩의 끈을 풀다

솔랭코 2023. 5. 13. 16:34

하나님의 은혜로 '나목'  '고엽'  '약수터' '겨울 꽃'  4편의 시가

'詩의 끈을 풀다' 4호에 수록되었습니다.

 

 

 

 

나목

 

 

나뭇잎이 불타서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

숨넘어가는 마른 잎이 고독하게 매달렸다

화려함 뒤에 감추어졌던 이면이

풍상을 몸소 겪으며 겨울빛으로 달랜다

야위어 바람이 불어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둥지는 회향을 품고 텅 비었다

남은 것은 적나라한 생채기뿐이라

햇볕마저 온기가 얼어붙어 차갑고

찬바람이 휘돌아 마른 잎의 목을 조인다

된서리를 맞아 낙향한 낙엽은 뿌리를 찾고

심장이 뛰는 뿌리의 원기가 동맥을 타고

모세혈관에 퍼져 재봉춘할 꿈을 꾼다

차가운 시간 속에서의 기다림은 길고도 길어

그리움이 허공에 매여 붙박였다

사지가 마비되어 기억상실증에 걸려

추억은 낙엽 속에서 썩어 가고

맨몸으로 맨손을 뻗어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고엽

 

 

가을이 입김을 불어 조연에 불과하다 꽃이 되고

가을의 절정에 나뭇가지에 울긋불긋 꽃으로 만발하던

나뭇잎이 냉랭한 인목에 가슴이 메말라

궤도를 이탈해 떨어지는 심경으로

시절을 잃어버린 낙엽으로 회귀한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마구 짓밟혀

기억이 부스러져 바스락 소리로 심정을 토해 낸다

인목에 매달린 사랑은 푸르고 화려할 때뿐이고

늙고 추해지면 한순간에 버려져

눈총을 맞는 애물이 된다는 것을

 

애물일지라도 어미 품을 떠나지 않은 고엽은

썩어져 엽락귀근으로 어미를 먹여 살리고

새로이 푸르고 만발할 것을 기대한다

끈질기게 뿌리를 놓지 않은 고엽이

인고의 세월로 썩어 화려한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약수터

 

 

수도계량기를 동파시키는 한파도

기저에서 분출하는 힘을 얼릴 수 없었다

혹한이 입을 꽁꽁 얼리지 않도록

입술을 좁게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며

욕구 분출을 주르르 무한리필 한다

다량의 광물질을 함유한 광천에서 분출해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정신과 생체 리듬을 건강하게 하는

약물을 담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약수통이 입을 크게 벌리고 마신다

걸려 있던 쪽박은 깨진지 오래지만

병든 리듬을 치료하기 위해

병객들이 한파와 맞서 인고한다

리듬을 알맞게 유지하는 비율을

건강하게 충족하기 위해 혹한에도

산책객들이 리드미컬하게 왕래한다

광천은 나이 들어도 생생하기에

나이 먹을수록 병드는 몸들이 미네랄을 보충해

무병장수하려고 부지런히 찾는다

기저질환을 앓으면 다병하기 십상이어서

기저를 생생하게 하려는 욕구들이 줄 섰다

한파에도 흐르는 물은 얼지 않기에

욕구가 고여 썩지 않도록

끊임없이 광천수를 공급해 리듬을 활발하게 한다

 

 

겨울 꽃

 

 

눈시울을 적신 눈물이 혹한에 얼어

기댈 곳 없어 펄펄 추락하다가

호시절을 다 보내고 허울만 남은 나뭇가지에

꽃씨를 뿌려 봉오리를 맺고 눈꽃을 피웠다

 

만년에도 맹추위에 굴하지 않는 노송에도

바늘로 콕콕 쑤시는 아픔을 딛고 피우고

목숨이 붙어 있어도 산목숨이 아닌 삭정이에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환하게 피우고

모든 걸 잃고 아랫도리만 남은 그루터기에도

온통 소복이 포근하게 덮어 주며 만발했다

 

앙상한 가지마저 삭정이로 만드는 찬바람 부는 혹한에

손발이 잘린 그루터기가 된 머리가

푸른 풀잎 하나 남김없이 호호백발이 되었다

 

꽃피고 열매가 주렁주렁하던 나무가

나이테가 늘어 낙엽이 다 떨어진 나목이 되었을지라도

만동에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의 겨울꽃을 피웠다

 

 

<詩의 끈을 풀다 4호(59 시인의 앤솔러지)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