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 '현수막' '들의 백합화' 세 편의 시가 동인지 시와 수필의 香 5호(2022년)에 수록되었습니다
'인물화' '현수막' '들의 백합화' 세 편의 시가 동인지 시와 수필의 香 5호(2022년)에 수록되었습니다
인물화
백지상태에 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도화지와 연필과 붓의
밀회가 그의 시간을 만들어 냈다
시간이 그를 그리며
순백의 살결이 아롱져 갈 때
시간은 변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현실이 점철된 과거를 터치하며
속마음이 드러났다
세상을 마주한 이목구비가
낮과 밤의 각도와 기울기에 따라 변모되고
명암이 뚜렷해졌다
시간이 퇴색되며
안색이 극명한 차이를 나타내었다
이목구비에
이때까지 목격한 장면과 간질인 소리와 내뱉은 말과 세상의 냄새가
배어 있다
내면과 세상이 부딪쳐 경계가 깨졌다
잘났다 못났다 편견이 내재되고
덧셈이 뺄셈이 되고 곱셈이 나눗셈이 되는
시간이 멈추어 있다
현수막
혹이 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겨드랑이를 부축해 줄 자세가 필요하다
한쪽만 편들면 삐딱할 수 있기에
양편을 거들어야 어깨를 똑바로 펴고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먹고살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위도 추위도 무릅쓰고
밤낮없이 중노동 해야 한다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에 채워진 삶이다
공중을 점거한 채
침묵시위 중이다
벽에 목을 매달고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다
삶에 집착한 글씨들이
강풍에 맞서 휘청거리며 투쟁 중이다
한 번 이용당하고 버려질 벙어리일지라도
명줄을 걷는 행인들이
무심히 우러러본다
들의 백합화
소녀와 초로의 여인이 다정히 손잡고
걷는 들녘에
들판과 하늘이 입맞춤해 해의 볼 발그레하다
시간이 성숙해 부풀어
소녀와 초로의 여인이 손을 놓치니
시간이 쏟아져 나오며
여섯잎꽃 백합화 열 송이 들녘에 낙화한다
상심한 초로의 여인이 들녘에 주저앉아
낙화한 여섯잎꽃 백합화 열 송이를 주워 어루만지니
16세 소녀가 61세 여인의 등에 십자를 긋고
꽃자루 달린 백합화 백 송이를 건네 위로한다
여인이 희망을 안고 백합화 백 송이를 들녘에 심는 사이
소녀는 간데없고
석양빛 비치며
여인의 등에 그어진 십자가 붉게 물든다
고즈넉한 해 질 녘
여인이 가슴에서 지갑을 꺼내
흰 백합화 같은 소녀의 흑백사진을 보며
조근조근 말하며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붉게 물든 상처가 치유된
희망의 밝은 새날을 기대한다
작가의 말
16세에 백일장 운문부 차상이 인생길을 운명 지었다.
새파랗던 싹이 60세가 넘어서야 꽃을 피웠다.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초로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동안은 길에 내걸린 현수막 같았는데 신념으로 이겨 냈다.
이제 앞으로의 자화상을 잘 그려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