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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진눈깨비 / 황동규
솔랭코
2017. 11. 1. 13:44
다음은 「월간문학」 2017. 11월호에 실린 황동규 시인의 시입니다.
봄 진눈깨비 / 황동규
불현듯 공기에 무게가 실리더니
진눈깨비 내린다.
길섶 개나리 노란 몸들을 숨기고
현충원 둘러싼 서달산 능선들 희미해지고
차갑게 흐르는 것이 머리에 얹힌다.
여기 정자 어디 있었지?
세상 일이 원래 한 치 앞이 안 보이기도 한다지만
꽃 피는 봄날 진눈깨비 속에 들기는 난생 처음.
봄도 몸살을 앓는가.
진눈개비 속을 재게 걷는다.
나무둥치 같은 게 있어 다가가니
지팡이 짚고 서있는 내 또래 노인,
같아 가자고 손짓하자
물 흐르는 모자이크 속에서 부식되는 성화(聖畵) 같은 얼굴,
가볍게 고개를 흔든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봄의 엉뚱한 흐름에
자신의 몸살을 부식시키고 있는가?
엉뚱한 느낌이라면 길 없는 길로도 차를 몰았던 나,
몸 덜 적실 곳 찾아 잔걸음질치고 있다니!
정자를 지나친다.
진눈깨비 가늘어진다.
머리 돌려 뒤를 보려다 제비꽃 머리를 간신히 피한다.
새 몸살을 건너고 있었다.
* 황동규 시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에든버러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대산문학상, 호암예술상 수상